[문화산책] 아시아 여성들, '근대성'이라는 부조리에 의문을 제기하다
[문화산책] 아시아 여성들, '근대성'이라는 부조리에 의문을 제기하다
  • 임동현 기자
  • 승인 2024.09.18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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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접속하는 몸-아시아 여성 미술가들'
이멜다 카지페 엔다야 '돌봄을 이끄는 이들의 자매애를 복원하기'. (사진=임동현 기자)
이멜다 카지페 엔다야 '돌봄을 이끄는 이들의 자매애를 복원하기'. (사진=임동현 기자)

(내외방송=임동현 기자) "모든 인간은 섬이다. 나는 이 말을 믿는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일부의 섬들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섬들은 바다 밑에선 서로 연결되어 있다". 영화 <어바웃 어 보이>에 나온 대사다. 각각의 장소에서 각각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가 인간이지만 분명 자신도 인식하지 못한 '연결된 부분'이 있고 그렇기에 인간은 외롭지 않다는 의미다. 우리는 인식하지 못하는 '연결고리'. 그 연결고리를 찾아가고 새로운 연결고리를 제시하는 이들을 우리는 '예술가'라고 부른다.

1960년대 이후 아시아 주요 여성 미술가들의 작품을 조망하는 대규모 기획전 <접속하는 몸-아시아 여성 미술가들>이 지난 3일부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대표적인 프로젝트인 '아시아 미술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진행된 이번 전시는 아시아 11개국의 여성 미술가들의 작품을 통해 아시아 여성 미술의 동시대적 의미를 살피는 전시다. 그동안 아시아 아방가르드, 아시아의 떠오르는 작가들 등을 소개했던 국립현대미술관이 이번에는 근대를 넘어 현대로, 새로운 세기를 향해가는 아시아 여성 작가들을 조망하고 있는 것이다.

국내 최초로 공개된 쿠보타 시게코의 '뒤샹피아나 :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 (사진=임동현 기자)
국내 최초로 공개된 쿠보타 시게코의 '뒤샹피아나 :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 (사진=임동현 기자)

잘 알겠지만 20세기 아시아 국가들 대부분은 식민 지배를 받았던 나라였고 전쟁 후에도 이데올로기의 갈등과 냉전, 독재, 자본주의 등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남성우월주의, '가부장'의 틈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서로 만난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아시아의 여성들은 그렇게 연결이 되었고 작가들은 '근대성'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온 부조리에 의문을 제기한다.

'아버지의 폭탄이 터진 뒤라고 한다/ 구워지고 있었다/ 전자레인지 에서 처럼 지방이 튀어오르고/ 불똥이 튀고/ 살갗이 타들어갔다'. 김혜순의 '엄마의 저녁 준비'라는 시를 바탕으로 윤석남은 손가락으로 불을 일으키며 오븐을 태우는 엄마의 모습을 그리고 박영숙은 김혜순의 '마녀 화형식'을 재해석하며 '마녀'라는 이름으로 사라져가야했던 이들을 <마녀> 시리즈를 통해 다시 살린다. 정강자는 1973년작 <명동>에서 상반신을 드러낸 채 명동 거리를 활보하는 여성의 모습을 그리며 주체적인 여성의 등장을 알리고 일본 작가 타나카 아츠코는 전구와 진공관을 이용한 '전기 드레스'를 입은 자신을 해석하고 표현한 <지옥의 문>을 남겼다.

그리고 필리핀의 선구적인 여성 미술가 이멜다 카지페 엔다야를 만난다. 그의 작품 <돌봄을 이끄는 이들의 자매애를 복원하기>는 스페인의 식민 지배에 맞서 독립 운동에 나선 비밀 결사조직 '카티푸난' 조직원들의 어머니, 아내, 딸, 자매의 연대를 담고 있다. 이는 스페인 식민 지배와 더불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필리핀 정부의 독재에 대한 비판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국가의 독재도 어떻게 보면 '가부장제'의 확장이라고 할 수 있고 그것을 여성들의 연대로 맞서보겠다는 작가의 의지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이미래 '봐라, 나는 사랑에 미쳐 날뛰는 오물의 분수'. (사진=임동현 기자)
이미래 '봐라, 나는 사랑에 미쳐 날뛰는 오물의 분수'. (사진=임동현 기자)
아라마이아니 '마음의 생식 능력을 막지 마시오'. (사진=임동현 기자)
아라마이아니 '마음의 생식 능력을 막지 마시오'. (사진=임동현 기자)

이들의 주체성은 '섹슈얼리티'에 대한 도전으로 이어진다. 욕망을 제도와 규율에 가둘 수 없다는 메시지를 담은 이미래의 <봐라, 나는 사랑에 미쳐 날뛰는 오물의 분수>, 인도네시아의 '산아제한'에 강력하게 반발하며 생리대, 혈액이 담긴 병을 전면에 내세우는 인도네시아 작가 아라마이아니의 <마음의 생식 능력을 막지 마시오>, '성기'에 대한 다양한 대화가 영상을 통해 선보이는 엔도 마이, 모모세 아야의 <사랑의 조건> 등이 그것이다.

국내 최초로 선보이는 쿠보타 시게코의 대표작 <뒤샹피아나 :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 미츠코 타베의 <인공태반>, 그리고 다양한 퍼포먼스 화면들이 소개되면서 전시는 그야말로 아시아 여성들이 숨겨왔던 욕망과 현실에 대한 분노를 가감없이 드러낸다. 

1989년, 중국 천안문 학생 시위가 일어나기 직전 작가 샤오루는 자신의 설치 작품을 향해 권총을 발사하는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그리고 그는 2003년까지 15년간 권총을 들고 그 권총의 파편을 남기는 사진들을 남긴다. '15번의 총성'으로 명명된 그의 작품은 이제 세상을 향해 과감하게 총을 발사하고 그 흔적을 지우지 않겠다는 아시아 여성들의 의지를 대변하는 듯하다. (그리고 불현듯, 작가의 결연한 표정에서 '시크하게' 격발을 하던 김예지 선수가 떠오르기도 한다.)

샤오루 '15번의 총성... 1989년부터 2003년까지'. (사진=임동현 기자)
샤오루 '15번의 총성... 1989년부터 2003년까지'. (사진=임동현 기자)

이 전시는 아시아 여성 작가들이 중심이 되는 전시이자 '아시아 아방가르드'의 역사를 볼 수 있는 귀한 전시이기도 하다. 사실 일본과 태국, 필리핀, 싱가포르 등의 아방가르드 작품은 전쟁과 독재, 민주주의의 파괴 등으로 영역을 확대하고 이를 가감없이 보여주면서 관객들에게 잔잔한 충격을 준다. 물론 한국의 여성 아방가르드도 뛰어난 작품들이 많다. 전시에 소개된 박영숙, 정강자 등의 작품은 억압으로 점철된 70년대에 여성의 주체성을 강조하며 하나의 혁명을 제안한다. 

그렇게 가사 노동의 부당함부터 섹슈얼리티, 여성으로서 살 권리, 환경의 변화, 민주화, 정치의 회복까지 광범위하게 퍼지고 광범위하게 연결되는 여성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하는 곳이 바로 이 전시다. 전시를 통해 울려퍼지는 여성들의 목소리는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이것은 실제 상황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받아들이고 해결해가야할 숙제다.

전시는 2025년 3월 3일까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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