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길을 향해 나아가. 지칠 때까지 걸어가. 나를 이끌고"
[문화산책] "길을 향해 나아가. 지칠 때까지 걸어가. 나를 이끌고"
  • 임동현 기자
  • 승인 2024.06.25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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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극단 '연안지대'
서울시극단 '연안지대'. (사진=세종문화회관)
서울시극단 '연안지대'. (사진=세종문화회관)

(내외방송=임동현 기자) 어느 날 갑자기 전화가 왔다. "따르릉 여보세요 와보세요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아내를 잃은 후 다른 나라를 떠돌다가 끝내 생을 마감한 아버지. 아들은 아버지를 어머니 곁에 모시려하지만 친척들은 거세게 반대한다. 결국 그는 아버지의 시신을 안고 아버지의 고향으로 떠난다. 하지만 그 곳은 내전이 치열한 곳이었고 그 곳에서 그는 전쟁으로 상처를 입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는 과연 아버지를 무사히 아버지의 고향에 안치할 수 있을까?

서울시극단이 6월 무대에 올린 연극 <연안지대>(~6.30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는 <그을린 사랑>으로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와즈디 무아와드의 '전쟁 4부작' 중 첫 번째 작품이자 국내 최초로 선보이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존재조차 희미했던 아버지의 시신을 묻을 땅을 찾아 나서는 주인공 '윌프리드'(이승우 분)가 전쟁의 참상을 마주하고 여정을 통해 만난 사람들과 함께 어우러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윌프리드의 아버지 이스마일(윤상화 분)이 죽어서도 아내의 곁에 가지 못한 이유가 있다. 이스마일이 아내 잔(최나라 분)을 죽인 장본인이라는 것이었다. 잔은 이스마일을 낳다가 세상을 떠났고 이스마일은 아들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고향을 떠난다. 그리고 대신 '부치지 못하는 편지'를 쓰게 된다. 방탕한 삶을 살던 윌프리드는 아버지가 죽어서야 비로소 아버지의 존재를 알게 되고 아버지를 고향 땅에 묻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그는 여정 속에서 내전으로 인해 보호자를 잃은 이들을 만나게 된다. 부모와 동생, 오빠의 죽음을 목도하고 마을에서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부르면서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는 방법을 찾으려는 시몬(윤현길 분),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하고 잔인하게 살해한, 그리고 어머니의 죽음까지 목도한 아메(이미숙 분), 자신이 보는 앞에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처참하게 살해된 후 계속 웃음소리를 내는 사베(공지수 분), 부모에게 버림받았지만 어느 순간 사람들에게 엄마같은 역할을 하게 되는 마시(정연주 분), 그리고 전화번호부에서 부모의 이름을 발견하고 죽음을 깨달은 뒤 큰 도시의 전화번호부를 들고 다니며 모든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하는 조제핀(조한나 분)가 그들이다.

내전으로 인해 보호자를 잃은 이들. (사진=세종문화회관)
내전으로 인해 보호자를 잃은 이들. (사진=세종문화회관)

어느 순간 그들은 윌프리드의 조력자가 되고 마침내 그들이 가고 싶어하는 '바다'에 도착한다. 그리고 이제껏 시신으로 누워있었던 이스마일이 윌프리드와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윌프리드의 꿈 속에서 그를 보호했던 요정이 바로 '죽은 어머니'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스마일은 잔의 출산을 적극적으로 말렸지만 잔은 "생명은 소중하다"며 출산을 고집했고 끝내 윌프리드의 탄생과 자신의 죽음을 맞바꾸었다. '생명은 소중하다'. 전쟁으로 얼룩진 바다에서 들려온 희망의 메시지가 전해지고 마침내 이스마일과 윌프리드, 그리고 여행자들은 한 가족이 된다. 그리고 아버지를 하늘나라로 보내게 된다. 

<연안지대>는 이야기 자체만으로 전쟁의 참상을 극복하려는 사람들의 의지를 느끼게 한다. 작가인 와즈디 무아와드는 7살 때 레바논의 내전을 경험했으며 이후 고국인 레바논을 떠나 프랑스를 거쳐 캐나다에 정착했다. 그가 겪었던 전쟁의 체험은 '전쟁 4부작'으로 이어졌고 그 중 두 번째 작품인 <화염>은 드니 빌뇌브의 영화 <그을린 사랑>을 통해 전 세계에 널리 알려졌다.

전쟁은 결국 피해자만을 만들고 희생자만을 만든다. '살아남은 자가 강한 자'라는 사회의 말은 진짜 전쟁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살아남은 자 역시 평생을 고통 속에서 지내야하고 결국 그 고통으로 인해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도 한다. 전쟁의 피해자들이 바다로 가는 여정은 어떻게 보면 고통을 벗어나려는 몸부림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곳에서 새로운 자신들의 보호자이자 아버지 '이스마일'을 만나게 된다.

(사진=세종문화회관)
(사진=세종문화회관)

"떠날 시간이 다가왔어. 길을 향해 나아가. 지칠 때까지 걸어가, 날이 밝기 전에 떠나. 그리고 도로 끝에서, 도시 끝에서, 나라 끝에서, 기쁨 끝에서, 시간 끝에서 화를 내고 분노를 토해내. 사랑과 고통 바로 너머에 기쁨과 눈물, 상실과 외침, 연안지대와 거대한 바다가 있지. 모든 걸 앗아가고 다시 나를 다른 곳으로 이끄는, 나를 이끌고, 이끌고, 또 이끌고".

이스마일은 모든 이들에게 이렇게 말을 하고 고향의 바다에 수장된다. 이를 누군가는 '씻김'이라고 표현한다. 맞다. 서로의 오해를 풀고, 한을 풀고, 자유로운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우리는 '씻김'이라고 부른다. 물론 이들이 완전하게 평안을 찾았다고 볼 수는 없다. 이후에도 더 큰 시련과 위협이 이들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전과 분명 다른 것은 있다. 혼자가 아닌 함께라는 것, 어렵다고 생각한 일을 이루었다는 것, 무엇보다 마음 속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살아났고 그렇기에 더 이상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소수의 권력자들로 인해 다수의 보통 사람들이 죽음의 공포에 직면하고 삶을 상실해야하는 현실에서 <연안지대>의 호소는 분명 유효하다. 그리고 그 호소는 전쟁의 참화를 겪었고 지금도 그로 인한 피해자들이 남아있는 우리나라에도 울림을 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후에 이 작품을 한국 상황으로 번안해서 공연해 볼 것을 제안하고자 한다. 해방 이후의 이데올로기로 인한 내분과 한국전쟁으로 소중한 이들을 잃은 사람들의 여정과 '씻김'이 어우러진다면 한 편의 멋진, 한국인의 감성을 건드리는 공연이 될 것 같다. 한국 버전의 <연안지대>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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